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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상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3-31 15:53
조회
1200

실연당한 상처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리는지 대답하셨다. 그분이 입을 열어 말씀을 토하셨고 고통 속에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침묵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해 왔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어떤 극적인 효과에 따라서 등급을 매기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장엄한 현현은 1위, 초자연적인 기적은 2위, 선지자의 메시지는 3위...., 즉 갈멜산에서 있었던 초자연적인 현상을 예레미야의 눈물 어린 설교보다 더 권능 있는 하나님의 역사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등급을 매기지 않으신다. 자신의 침묵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선지자들을 가리키시면서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고 하신다. 어떻게 한 나라에 에스겔, 예레미야, 다니엘,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이 잇었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불편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말씀”이 확증을 별로 주지 못하는 증거라고 여기지 않으신다. 기적은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 세대에 전달되도록 영구히 기록되어 있었다. 가끔은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향하신 사랑의 증거로 과거의 기적을 가리키기도 하시지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가 더 많았다.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저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이것은 화가 난 아버지의 목소리와 같았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셨다. 그분의 결론은 옳았다. 백성들은 이사야를 향해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아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더 나시게 하라”고 경고했다.


“내가 참으로 너희 앞에서 떠났노라.”


선지자들이 왜 하나님은 숨어 계시냐고 소리 높여 원망했을 때 하나님은 논쟁하지 않으셨다. 선지자들의 말에 동의하셨고 그분이 왜 그들 앞에서 떠났는지 설명하셨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백성들의 행위를 보고 예레미야에게 역겨운 마음을 표하셨다. 부정한 이득, 무고한 자의 피 흘림, 압제와 강탈, 하나님은 자신의 눈을 가리고 기도할 때 그들의 내민 손잡기를 거절하셨다. 그 손은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이 정도를 넘어서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백성들을 그냥 죄 가운데 버려 두셨다“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게 놔두시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에 그들을 버려 두셨다.


하나님은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했은 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행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내가 약해서가 아니요. 나의 긍휼로 인함이라.”


하나님이 속히 벌하지 않으시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이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 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틀린 것은 그들이었다. 하나님의 더디 행하심은 그분의 긍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유예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부모처럼 마지못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다.


이스라엘이 받았던 징벌은 이방 민족의 침입이었다. 그러나 선지서 말씀은 세상이 끝나는 날에 “주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한다. 가장 두려운 묵시적 이상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 사이에 들어가 있다. 본훼퍼는 “마지막 말씀을 듣기 전에 바로 그 앞에 있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 날에 대한 선지서의 말씀을 연구하면 할 수록 나는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 직접 개입하시는 일에 대하여 소극적인 하나님께 만족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실망할 때 나는 그분이 권능 가운데 역사 하시기를 간구했다. 독재정치, 불공평, 불의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리웠던 모든 장막을 거두시는 그 날에 대한 선지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나는 그 때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권능을 숨기고 계시다고 인정하신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시다. 오늘날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기적이 어디 있냐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선지서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잠시 기다려라.


“나의 심판은 엄하지만, 나는 지금 너와 고통을 함께 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자신의 아픈 심정을 표현하셨다. 다음에 한가지 예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적군이었던 모압 민족의 멸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부르짖으리니......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같이 소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치와 모욕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 역시 수치와 모욕을 감수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군사들이 성전의 대들보를 도기로 찍어 내리는 끔찍한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침입한 곳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었다. 하나님께 그 침입은 모욕적인 일이었다. 성전이 무너짐으로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무너졌다. 도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힘으로 하나님 자신이 포로로 잡혔다. 바렐론 군사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그들은 이스라엘을 조롱한 것이 아니라 힘없는 그들의 하나님을 조롱했다.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오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했음이니라.”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하자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이사야서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셨는지 모르지만 그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든지 너희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나님은 엄중한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도중에 갑자기 말을 바꾸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다. 이스라엘의 가장 사악한 왕이었던 아합도 갈멜산에서의 기적 이후에 여러 차례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또한 예레미야에게 의로운 한 사람만 있으면 예루살렘 성을 사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요나서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는 예언의 말씀이 딱 한 군데 밖에 나와 있지 않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런데 이 소식이 전해지자 요나가 그토록 싫어했던 니느웨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하나님은 심판의 계획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의 영적 부흥을 몹시도 싫어했다. 시든 박 넝쿨 아래에서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심했던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고백하기에 이른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면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나이다.”


요나의 불순종, 바다의 풍랑, 물고기 뱃속의 삼일 삼야, 이 모든 일은 결국 요나가 하나님을 니느웨를 향한 심판을 돌이키지 않는 무자비한 분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말한 대로 “이제 요나 이후로 하나님이 그 뜻을 돌이켜 다시는 인자를 베풀지 아니하시는 그런 엄한 분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환난 당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고통과 배신감이 경감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하나님의 이성적 변론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듯하다. 선지자들은 지적인 문제보다 하나님의 심정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사용했던 비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부모로서의 하나님, 사랑하는 연인으로서의 하나님 모습을 말이다.


처음 부모가 된 사람을 생각해 보자. 대화 주제도 아마 자신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 한 가지뿐일 것이다. 자신의 아기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예쁘게 보인다. 입을 열어 처음 한 말이나 처음 걸음마 하는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 비디오를 구입하는 등 많은 돈을 소비한다. 약 50억의 보통 사람들이 다 마스터한 행동인데 말이다. 이러한 부모의 행동은 아이와 맺은 새로운 관계 속에서 느끼는 자부심과 기쁨을 잘 나타내 준다.


이스라엘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관계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부모들이 바라는 것을 똑 같이 소망하셨다.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 행복한 가정, 다음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옛날을 회상하면서 기쁨으로 노래를 불렀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이 부모의 심정에서 상처받은 연인의 심정으로 바뀌면서 그 기쁨은 사라지고 만다. “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슬픔과 경악, 분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그들은 살찌며 두루 다니는 수말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 도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선지서를 읽으면서 나는 하나님이 상담자를 찾아온 사람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상담자가 이야기한다.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내 심정이 어떤지 말하노라. 나는 지금 거절당한 아비 같구나. 다리 밑에 버려져서 거의 죽게 된 갓난아이를 주워 내 딸로 삼았노라.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보내고 나는 그 아이에게 모근 사랑을 쏟아 부었노라. 그런데 어느 날 집을 나가고 말았다. 얼마 후 신문의 보도를 보니 그 아이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를 저주한다고 했다.”


“내 심정이 어떤지 다시 말하노라. 나는 지금 실연 당한 사람 같구나. 지치고 상한 여인을 데려와 다시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여인은 내게 아주 소중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말았다. 그 여인은 나의 친구들과 나의 원수들을 쫓아 나갔다. 그리고 길거리를 배회하며 창기보다 더한 사람이 되어 돈을 주며 자신의 정욕을 채우고 있다. 나는 버림받았고 배신당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상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셨다. 그리고 충격적인 언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발이 빠른 젊은 암약대, 광야에 익숙한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성욕의 대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말로는 모자라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선택하사 그의 삶이 직접 비유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했다. 그 후 이 선지자는 삼류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다. 시간이 지나가도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서는 고멜의 죄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때마다 호세아에게 그 아내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호세아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픈 마음을 나태 내고 계셨다. 이스라엘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사랑은 마치 광야에서 포도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신의를 저버리자, 하나님은 실연 당한 연인의 상처와 수치를 감수해야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연민의 감정에까지 이른다.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하나님이 마치 실연당한 사람 같다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왜 자꾸 그분의 마음을 바꾸는 것처럼 보이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실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시며 그분의 두 팔을 펼쳐 보이셨다. 그리고는 다시 엄한 시판을 선포하셨다. 이러한 심적 변화는 실연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비이성적 반응이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이웃집에서 싸우는 두 연인의 소리같이 들린다. 내 친구 중의 한 사람은 2년 동안 옆집 부부가 다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11월에 아내는 외도를 한 남편을 죽이려고 했다. 2월이 되자 아내는 남편을 용서했으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4월에는 아내가 이혼 소송을 했고, 8월에는 그 소송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남편을 향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2년이 흐른 뒤 비로소 그 아내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결국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갖고 계셨던 일련의 감정 순환이었다. 분노, 슬픔, 용서, 질투, 사랑, 그리고 고통,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얼마나 깊은 고민을 하셨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배신한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인 것을 알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아내처럼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기도 소리를 듣지 않겠노라고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잠시 뒤 내 친구 리처드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분노를 가라앉히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셨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가 충돌하여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대안들이 수포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결국 포기하기로 결정하셨다.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리처드는 하나님이 그를 실망시켰을 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고 고백했었다. 특별히 자기 약혼녀가 결별을 선언했을 때 더더욱 거러했다. 그러나 선지서의 말씀, 특별히 호세아서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배신감은 바로 하나님이 느끼셨다. 배신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표시하면서, 하나님은 무관심하시며 침묵하신다고 그분을 송사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시기 시작했을 때 그분은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쏟아 부으셨다. 사실, 정말 실망한 쪽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어떻게 처치할 꼬?” 하나님의 이 비통한 질문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발생한 모순을 선명하게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공중의 나는 새도 시절을 알고, 바닷물도 때를 따라 움직이며, 하얀 눈은 항상 산봉우리를 덮고 있지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너무도 다르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 인간을 그분의 마음 속에서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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